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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문학

무희- 모리 오가이



 일본 여성(츠위사 지음)이라는 책에서 미국식 넓은 저택에서독일제 차를 타고일본 여자와 사는 것이 한 남자의 바람이라며 인용된 것을 본 적이 있다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일본 여성상은 사실은 차치하고서도 꽤나 일반적인 편견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의 남존여비 사고방식이 만연했던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유교를 뿌리로 한 조선시대와 무척 닮았다. 그리고 이러한 종래의 굴레에서 근대화와 함께 벗어났는가라고 하면 또 그렇지도 못하다. 전통적 여성관에 서구적 여성관이 어우러져 현모양처로 대표되는 여성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여성관의 흐름에서 보았을 때, 모리 오가이의 『무희』는 무척 진보적인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1881년 도쿄대학 의학부를 최연소의 나이로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하여 근대 위생학을 공부했던 모리 오가이가 자신과 당시 독일에서 만난 엘리제와의 이야기를 도요타로와 엘리스로 대신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재나 주제의식이 현재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매우 파격적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비록 외국 여성이기는 하나, 독일 여성 엘리스를 통해 봉건적 사회질서에서 근대로 이동해가는 일본 지식 청년층의 불안한 정체성과 시대 의식을 꼬집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스는 이국 남자와의 교제 가운데 임신을 하면서도 자신의 도요타로에 대한 사랑을 굳건히 이어나갈 뿐만 아니라 배신감에 정신병에 걸리기까지 하지만 자신의 아기를 위해 만든 기저귀만은 끝까지 손에 쥐는 모습을 보이며 뚜렷한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도요타로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층임에도 불구하고 줄곧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아이자와 겐키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아, 아이자와 겐키치와 같은 좋은 친구는 세상에 다시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의 뇌리에 단 하나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자신의 죄책감을 친구 아이자와 겐키치에게 전가함으로써, 미성숙한 자아를 암시하는데, 이는 자아가 확고한 독일 여성 엘리스의 근대적 사고, 자아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모리 오가이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측면을 전제로 한다면, 무희라는 작품은 사랑한 여자를 버리고 권력을 선택한 남성의 비윤리성이라는 윤리적 범주에서 주제의식이 도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비윤리적 행위를 반성 혹은 변명하는 의도로 저술한 바도 있겠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여성관과 당시 근대화 속에서도 결국 제자리를 맴돌던 자신을 비롯한 지식층의 한계에 대한 비판을 작품의 전반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의사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고등교육을 받은 천재이면서도 성실한 모리 오가이는 한문학, 의학, 영어, 독일어 등 근대 교육의 수혜자로 지식층으로 성장했지만, 당시 변화의 시작점에 있었던 일본의 분위기는 그의 의식보다 뒤쳐져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번민하던 모리 오가이의 시대 의식이 자신의 경험과 함께 맞물려 발현된 것이다. 또한, 할머니와 어머니의 훈육으로 다섯 살 때부터 아침 일찍 1km나 떨어진 곳에 가서 논어맹자를 배웠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 교양 있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애정과 교육 하에서 긍정적 여성관이 형성되어 봉건적 질서에 머물러 있던 당대 여성들을 지적하고 자 한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도요타로와 엘리스로 대변되는 봉건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상충하여 생겨난 갈등을 오가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